경남도립미술관 정연두 커미션 신작전

 

[전시 리뷰]  고려인 이주사, 예술로 다시 피어나다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알루미늄 오이>정연두 전시에서는 정연두 작가의 커미션 신작 4점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디아스포라의 역사이자 척박한 땅에서 삶을 개척해 낸 고려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다룬 작품들입니다.
 정연두 작가는 1937년 강제이주라는 비극적 사건에서 출발해, 그들의 시간을 다양한 감각(영상, 조각, 설치, 드로잉)으로 다채롭게 풀어냅니다. 주요 전시실별 작품과 그 안에 담긴 깊은 의미를 소개합니다.

1. 영상전시실 | 《산조열차: 1937》 (2026)

영상전시실에 들어서면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알마티로 향하는 열차 차창 밖 풍경이 무한히 펼쳐집니다.

  • 역사적 배경: 1937년 스탈린 정부는 연해주에 거주하던 약 17만 명의 고려인을 일본과의 내통 가능성 등 차별적 시선 아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목적지도 모른 채 화물열차에 실려 6,000km가 넘는 황무지로 내던져졌던 순간의 막막함이 카메라 프레임에 담깁니다.

  • 소리의 변환: 작가는 열차의 덜컹거리는 진동과 소음을 '가야금 산조' 연주로 변환했습니다. '흩어지는 가락'을 뜻하는 산조(散調)의 즉흥적이고 서글픈 가락은 90여 년 전 고려인들이 품었을 깊은 심상과 겹쳐지며 강한 울림을 줍니다.

2. 1전시실 | 정연두 《알루미늄 오이 (Aluminum Cucumber)》 (2026)

1980년대 소련의 전설적인 고려인 록가수 빅토르 최(Victor Tsoi)의 노래 제목에서 착안한 대형 조각 작품입니다.

  • 불가능의 결합과 역설: 차갑고 인공적인 '알루미늄'과 생명력 있는 자연물인 '오이'의 결합은 부조리한 사회와 억압을 암시합니다. 결코 자랄 수 없는 금속 오이라는 역설을 통해, 생존이 불가능해 보이던 황무지에서 텃밭을 일구고 실제 오이를 키워낸 고려인들의 억척스러운 생명력을 증명합니다.

  • 작품 디테일: 오이 표면에는 러시아어 알파벳 총 501개가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아리랑 노래가 흘러나오면 턴테이블이 돌아가며 러시아 할머니의 목소리가 얹어지는데, 이는 언어를 빼앗긴 비극 속에서도 문화를 지켜내며 당당한 삶의 주체로 자리 잡은 이주민들에 대한 트로피 같은 명예로운 작품입니다.

3. 2층 3전시실 | 《발효산조》 (2026) & 《바실러스 초상》 (2025)

공간 전체에 스며든 쿰쿰한 발효 냄새와 따뜻한 빛, 그리고 은은한 가야금 산조 소리가 감각을 자극하는 공간입니다.

작품명주요 특징 및 예술적 메시지
《발효산조》 (2026)
• 60개의 항아리 설치: 콩을 띄우고 장을 담그는 고려인의 '발효 문화'를 시각화.


• 시간의 축적: 미생물이 장을 숙성시키듯, 낯선 땅에 정착하기 위해 견뎌낸 기다림과 문화적 정체성의 지킴을 상징.


• 빛과 줄: 가야금의 12줄을 상징하는 12개의 장독에서 빛이 흘러나옴.

《바실러스 초상》 (2025)
• 메주 위의 생명력:  메주에서 바실러스 균이 피어오르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 시리즈.


• 죽음에서 재탄생으로: 발효를 소멸이 아닌 '재탄생'으로 바라보며,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피어나는 균을 통해 고려인들의 '믿음'과 생존의 태도를 조명.

4. 2층 특별전시실 | 《연기 드로잉-균형》 (2026)

불에서 피어오른 그을음(연기)을 캔버스에 안착시킨 후 세필 붓으로 섬세하게 완성한 6점의 드로잉 신작입니다.

  • 통제할 수 없는 재료, 연기: 강제이주라는 역사적 거친 파도 속에서 고려인들이 직면했던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던 삶의 환경'을 상징합니다.

  • 균형을 향한 의지: 작가는 통제 불가능한 그을음 위에서 세필 붓으로 형상을 그려냄으로써, 상처와 불안정함 속에서도 끝내 삶의 균형을 찾아낸 인간의 고귀한 의지와 흔적을 보여줍니다.

이번 전시는 고려인을 단지 역사 속 '불쌍한 피해자'로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개척하고 자신들만의 정체성과 삶을 훌륭히 일구어낸 '당당한 개척자'로서 그들을 조명합니다. 오감으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의미 깊은 전시입니다.

정연두 작가의 최신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11월 1일까지 진행되니 그 전에 꼭 한번 방문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