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슬지 않는 오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알루미늄 오이》와 『디아스포라 기행』을 나란히 읽다
경남도립미술관 앞마당에는 텃밭이 있다. 그 텃밭에는 오이 모종이 심어있다. 그런데 미술관 안 전시실에는 심어도 자라지 않고, 아무리 두어도 썩지 않는 오이가 501개 놓여 있다. 흙이 아니라 알루미늄으로 빚은 오이들이다. 정연두 작가의 개인전 《알루미늄 오이》(2026년 7월 29일~11월 1일, 경남도립미술관 1·2층 전관)를 보고 나오는 길에, 나는 오래전 읽었던 책 한 권을 다시 펼쳤다. 재일조선인 지식인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이다. 서로 다른 시기, 다른 매체로 만들어진 이 두 작업이 내 안에서 자꾸 겹쳐졌다.
자라지 않는 오이, 썩지 않는 시간
전시 제목 '알루미늄 오이'는 고려인 출신 록 뮤지션 빅토르 최가 이끌던 밴드 '키노'의 노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전시장 중심에는 같은 이름의 대형 설치작품이 놓인다. 알루미늄으로 주조한 오이 501개가 영상, 사운드와 함께 얽혀 있는 작업이다. 진주 출신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07)에 선정된 바 있는 정연두는 이번 전시에서 신작을 중심으로 사진·영상·조각·설치·사운드·드로잉 등 서른여섯 점을 선보이는데, 그 중심에 놓인 화두가 바로 고려인의 강제 이주와 그 이후의 시간이다.
생명력을 잃은 금속으로 빚어진 오이는 얼핏 기괴하다. 자라지도, 썩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그 '멈춰버린 성장'이야말로 척박한 땅에서도 삶을 이어가야 했던 사람들의 시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은 기차 안에서, 낯선 황무지 위에서 다시 뿌리내려야 했다. 정연두의 다른 작업 '산조 열차: 1937' 역시 그 강제 이주의 기억을 다루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자라나지 못한 채로 존재를 이어가는 알루미늄 오이는, 고국을 떠나야 했던 이들이 감내한 정지된 시간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추방당한 자의 시선으로 본 세계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은 저자가 런던, 광주, 카셀, 잘츠부르크 등지를 여행하며 만난 예술 작품들을 디아스포라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낸 에세이다. 그는 이 책에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유대인 공동체에 국한하지 않고 근대의 노예무역과 식민 지배, 지역 분쟁과 세계대전, 시장경제의 세계화 같은 외부적 힘에 의해 폭력적으로 공동체에서 이산당한 사람들과 그 후손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다시 규정한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두 형이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오랜 세월 옥고를 치르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서경식에게, 여행은 단순한 예술 순례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존재 방식의 유래와 의미를 되짚어보는 일종의 순례였다. 그는 식민주의가 타자의 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폭력이라고 짚으며, 그 폭력이 피지배 민족으로 하여금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끝없이 되묻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물음은 세대를 넘어 대물림되는 상처이기도 하다.
도슨트의 눈으로, 두 텍스트를 잇다
미술관에서 관람객을 만나는 도슨트로서, 나는 이 두 텍스트가 같은 질문을 서로 다른 언어로 던지고 있다고 느낀다. 서경식이 문장으로 짚어낸 '추방당한 자의 시선'을, 정연두는 알루미늄이라는 차갑고 낯선 재료로 조형해낸다. 하나는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언어, 국적을 다시 묻게 만들고, 다른 하나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익숙한 사물(오이)이 낯설게 배신당하는 순간—흙이 아닌 금속, 자라지 않는 채소—을 통해 같은 질문에 닿게 한다.
남는 것들
전시를 기획한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 전시가 특정 공동체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이동과 공존,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자리이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서경식 역시 디아스포라를 특정 민족의 과거사가 아니라, 폭력에 의해 뿌리 뽑힌 모든 존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다시 정의했다. 두 사람 모두, 결국 '떠나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여기의 우리를 되비추고 있는 셈이다.
전시장을 나서며 다시 텃밭에 심은 오이 모종은 여름이 지나면 자라고, 여물고, 언젠가는 시들 것이다. 반면 전시실 안의 알루미늄 오이 501개는 내년에도, 십 년 뒤에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그 대비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자라지 못한 채 멈춰버린 시간과, 그럼에도 계속되는 삶. 어쩌면 디아스포라의 역사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참고: 정연두 개인전 《알루미늄 오이》(경남도립미술관, 2026.7.29.~11.1.), 서경식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돌베개)